약간 어긋난 사람들

에세이 2021년 7월 28일

한눈팔다 신도림역에 내리지 못하고 지나칠 때까지만 해도 조금 귀찮은 상황이 됐다고 여겼을 뿐이다. 딱 한 정거장만 되돌아 오면 되는 데다 오늘은 자체적으로 5분 조기 퇴근 하면서 평소 타던 것보다 10분 일찍 전철을 탔기 때문이다. 대충 봐도 신도림역으로 돌아가 인천행 전철로 환승하기 위한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껏 서둘러서 나왔는데 집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하겠네. 으이구, 이 멍청한 작자야…'

스스로를 가볍게 타박하며 반대 플랫폼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쪽 전철도 막 도착했던 모양인지 사람들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지친 얼굴들 사이를 헤집고 황급히 뛰어올랐지만 문은 이미 닫힌 상태. 혹시 다시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은 이내 저 멀리 떨어진 도시 불빛을 향해 꼬리를 돌려 사라졌다.

배차 간격을 풀타임으로 기다려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약간 불안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막차를 놓치겠어? 얼른 앱을 켜서 인천행 전철 시간을 찾아봤다. 막차는 11시 29분. 이상하다. 분명 더 늦게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 11시 15분이니까 넉넉하군. 곧바로 신도림역으로 가는 전철을 검색했다. 11시 27분. 뭐야? 왜 이렇게 늦어?

땀샘이 폭발했다. 지연되지 않고 딱 맞춰 들어온 전철을 타고 신도림역으로 가서 전속력으로 뛰어 환승 플랫폼으로 가는 데까지 2분? 이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머릿속으로 그런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도 손으로는 이미 집 근처까지 가는 야간 버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택시를 타는 미친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면서.

전철은 놓쳤지만 다행히 버스는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거장을 지나친 죄로 평소보다 한 시간 더 늦게 귀가하는 건 여전히 억울한 일이었다. 루틴에서 겨우 한 발짝 벗어났을 뿐인데 이렇게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하다니? 안온하다 믿었던 일상이 사실은 절벽 위에 아슬하게 걸쳐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모든 게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얼마 전부터 변경된 근무 시간 탓인 셈이다.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1시. 출퇴근이나 주말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인 타임 테이블에 약간 어긋나 있다. 근무 시간에 대해 얘기하면 지인들은(물론 예전의 나조차도)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장단점은 있겠지만 적응하기 힘들겠다."

생각보다 장점은 많다. 우선 추가 근무가 없다. 할 일이 남았는데 퇴근하는 데서 오는 찝찝함에 비해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출근해야 할 것 같다는 걱정을 이겨내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내 좌우명은 '어떻게든 되겠지'다). 어쩌면 나, 생산성이 조금은 올랐을지도? 게다가 태생적으로 아침형 인간이라 저녁보다는 오전의 자유시간이 더 좋다.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 정도를 빼면 단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마저도 시국이 시국인지라 기회비용이 크게 낮아진 상태라 크리티컬한 부분이 없다. 크게 줄어든 술자리가 아쉽긴 하지만 시간을 보내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우는 계기로 삼았다. 나, 취향이 조금은 다양해졌을지도? 대충 각오했던 것보다 상황이 괜찮다는 얘기다.

핵심은 '적응하기 힘들겠다'라는 말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평일'과 '나인 투 식스(9 to 6)'라는 거대한 틀은 사회인으로서의 개인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세계다. 그리고 거기에 어긋난 사람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어긋난 사람들을 위한 세계는 없다는 사실을. 보편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그건 유일한 전부였다.

서울 수도권에 적용된 거리두기 4단계 방역 수칙은 오후 6시 이후 3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를 포함한다. 정부는 '오후 6시'에 대해 '경제활동이 종료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퇴근 후 바로 귀가하는 등 외출을 금지하고 집에 머물도록 하는 의미의 조치'라고 설명했다. 밤 10시 이후 전철 배차 간격과 막차 시간 조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보편은 누구의 것인가. 물론 사회 정책은 이미 형성된 지형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특히 이번처럼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경우엔 더더욱.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재택근무할 수 없고 그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최소한의 일상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건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지 않나.

당연하지만 내가 겪은 불편이 누군가에게는 불편 축에도 못 낄 것이다. 심지어 거리두기 이전부터 이미 이런 불편을 겪어온 사람도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깨달았다. 역지사지는 선한 의도나 개별적인 의지만으로 닿을 수 없었다. 결국 나도 내 세계의 보편으로 끌려 들어가는 인간이니까.

막차 놓쳤다고 억울해서 쓰는 글이 맞다. 하지만 달라진 일상의 타임 테이블에 골몰하다보니, 이미 다른 일상의 타임 테이블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런 저런 질문으로 떠올리게 된 것도 맞다. 약간 어긋난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 '너무 니치하다'거나 '매스하지 않다'라는 피드백의 행렬 속에서 나는 그것들에 대한 감각을 퇴화시켜버렸던 걸까.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1년 7월 28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52호 : 약간 어긋난 사람들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레터 52호 : 약간 어긋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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