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루의 미학
노동요로 틀어놓은 팝송이 잔잔히 흐르는 오후 네시의 사무실. 키보드 타닥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하지만 난 지금 할 일이 없다. 아무리 확인해도 할 게 없다. 사무실 창밖으론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잠시 비 구경을 하며 동료들이 만들어내는 백색소음을 의식하다가,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문득 자각했다. 그래, 오늘은 월루구나.
눈치를 보다 살포시 의자를 밀고 탕비실로 갔다. 기쁘게도 누구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믹스커피가 뜨거운 물에 녹아내리는 걸 보다 보니 가슴속에 다시 한번 기쁨이 샘솟는다. 월루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리에 돌아와 별 의미 없는 문서 창 몇 개를 듀얼 모니터에 띄워두고 홈택스에 접속해 원래는 집에 가서 하려고 했던 귀찮은 일 몇 가지를 처리했다. 콧노래를 애써 참고 속으로 읊조렸다. '개이득...'
머릿속에 통통하게 떠오른 '개이득'이란 단어를 응시하다 보니 '개이득'이야말로 월루의 본질적인 속성이란 데 생각이 미쳤다. 월루는 즐겁다. 왜냐? 개이득이기 때문에.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비용과 그에 따르는 가치를 저울질한다. 이득이면 기쁨을 느끼고 손해면 슬픔을 느낀다. 직장인이라는 신분은 고도로 훈련받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임을 의미한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지하철 출근길에서 평소엔 그렇게 손이 안 가던 책이 술술 읽히는 경험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이건 가성비의 논리에 절여진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뇌가 작동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때의 '개이득-로직'을 언어로 표현하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1. 지하철 타는 시간은 어차피 이동에 쓰는 시간인데 2) 그 시간에 책까지 읽는다면 3) 이거야말로 개이득. 월루가 개이득이 되는 메커니즘 또한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회사에 팔아치운 줄 알았던 시간이 기특하게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온 것이 '월루'다.
그때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는 신경 쓰이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계속해서 일하는 척을 했다. 다행히 팀장은 내게 별 관심을 주지 않고 어디론가 떠났다. 어쩌면 팀장도 월루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짧은 순간의 긴장과 해소는 월루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깨닫게 했다. 월루에는 저항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우리는 관리자의 눈을 피해 월루를 한다. 일하지도 않으면서 일하는 척을 한다. 이런 속임수가 가능하다는 것은 회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우리는 일방적으로 착취당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월루하는 동안 우리는 외눈박이 거인의 동굴 안에 갇혀있지만, 거인의 양 떼를 잡아 포식하는 재기 넘치는 오디세우스가 된다. 노예처럼 일한다며 자조에 빠졌던 직장인의 인간성이 월루를 통해 한순간에 영웅호걸의 호연지기를 회복해낸다.
월루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꾸준히 흘러 어느새 5시, 슬슬 배가 고프다. 이렇게 탱자 탱자 노는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니, 위장은 정말 쉴 새 없이 일하는구나 싶었다. 위장이 내는 꾸르륵 소리를 듣다 보니 이번엔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위장은 쉴 새 없이 일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놀고 있는가? 아니면 일하고 있는가?'이 물음은 물론 개소리이지만, 나이면서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나, '몸' 의 존재를 상기하게끔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몸이다. 누구나 자신의 몸을 먹여살려야 한다. 일의 의미는 어쩌면 몸을 먹여살리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고작 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생-인간의 삶-이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대체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월루하는 정신과 배고픈 몸의 대비는, 상동관계에 있는 일의 형이상학적인 부분(자아의 실현)과 유물론적인 부분(밥벌이)를 함께 고민하게끔 만들었다. 물론 고민한다고 해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지만. 사실 이런 잡생각은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답도 구할 수 없는, 생산성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치품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의 사치는 오직 몸을 회사에 방목시킴으로써 밥벌이의 굴레에서 잠시 풀려난 월루하는 동안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월루야 말로 근심 걱정 없는 철학자의 낙원이요, 도끼자루 썩을 염려 없는 신선놀음이다.
유례없는 생각의 사치, 풍성한 잡생각을 즐기다 보니 이번엔 월루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도대체 이 삶의 성찬은 누가 차려둔 것일까? 그저 행운일 뿐일까? 앞자리 동료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일하는 동료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월루는 타인에게서 온 것임을.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월루를 즐기는 것은 회사 내에서 다른 동료가 일을 더 했기 때문이거나, 외주업체의 누군가가 갈려나간 덕인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조금은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옛사람들이 식사를 앞두고 천지신명의 몫으로 밥 한 숟가락을 바치며 고수레라고 외쳤듯이, 앞으로는 월로 하기 전 속으로나마 삶의 성찬을 마련해 준 동종업계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그런 생각까지도 들었다.
잡생각을 마치고 시계를 봤다. 5시 30분. 이득을 즐기고, 호연지기를 충전하고, 생각의 사치를 누렸는데도 여전히 사무실은 평화롭다. 심지어 만물의 조화에 경의를 표하기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메신저는 잠잠하다. 오늘은 이대로 퇴근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남은 30분 동안 지금 여기서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월루 밖에 없다는 단단한 확신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월루야 말로 삶의 축제다. 자리에서 일어나 "월루하라! 한가한 오후 사무실에서! 옥상에서! 거래처로 향하는 택시에서! 화장실에서! 어디서든 월루하라! 월루 만세! 만약 이미 월루하고 있다면, 더욱더 격렬히 월루하라!"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다스리며, 분할 화면으로 웹툰을 봤다.
Credit
글 | 야백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1년 7월 7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49호 : 월루의 미학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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