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카펫 위에서
잠옷 차림에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 책가방을 멘 채 윙크를 날리는 치명적인 아이가 있다. 20년도 더 지난 사진 속 나의 행색은 누가 봐도 첫 등교를 앞둔 설렘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분출해버리는 아이의 그것이다. 그래. 많이 분출해두거라. 내일이면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행렬을 따라 교문을 통과하고 운동장에 줄맞춰 서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을 들은 다음 배정된 반 교실로 가 처음 보는 친구들에 둘러 싸여 교과서를 받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때는 긴장감에 막혀 설렘 따위는 분출하고 싶어도 못할 테니.
처음은 늘 설렌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처음 겪는 것이라 대체로 서투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작 ‘처음’에 발 딛고 나면 다른 무엇보다 긴장감을 가장 크게 느끼곤 한다. 물론 그마저 설렘의 일부로 여기는 담대한 사람들도 있지. 아쉽지만 나는 그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감을 설렘으로 착각했던 게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으니. 처음에 대한 순수한 설렘은 그 이후에 따라오는 긴장감에 휩싸여 보지 않았던, 첫 등교 전 날에 느꼈던 것이 마지막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가 느끼는 설렘과 확연히 다를 테다.
지난 한 달은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내 모니터에 집중하는 동시에 옆자리 동료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일이 잦았다. 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지만 상체는 옆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타이핑을 했다(내 어깨, 척추, 허리, 골반 들아! 괜찮니?). 자세는 어정쩡했지만 적응은 어정쩡하지 않았다. 크게는 실무와 문화라는 두 측면에서 대표, 팀 리더, 팀원, 타 팀 동료에 이르기까지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해진 프로그램과 자연스러운 터치가 뒤섞인 온보딩에 감동했다.
한 달 간의 경험이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어느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새삼스레 검색해봤다. 온보딩(onboarding)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배에 탄다'라는 뜻으로 새로 입사한 직원이 조직에 쉽고 빠르게 적응하도록 조직문화를 알려주고 업무에 필요한 정보·기술 등을 교육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어지는 상세 설명을 보면 기업은 온보딩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첫째가 신규 직원의 이직을 막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이직을 막고" 부분이다.
이직이라...이직. 그제서야 최근 몇 년 간 매해 버킷리스트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이직'이 올해는 여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나...이 회사 좀 오래 다니고 싶다 생각해 버린 걸까? 물론 여기서 이직을 막는다는 것은 채용에 들어간 회사의 리소스를 낭비하지 않기 위함을 의미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사실 많은 직장인이 퇴사나 이직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회사 입장에서도 손해가 아닌가. 결승선이 ‘함께 성장'이 아니라 ‘퇴장'인 사람이 100% 능력을 발휘할 리가 없지. 진짜로 나가버리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회사는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반대로 내가 ‘나가버리는 게 이득인 사람'으로 판정되면 이처럼 신경써 주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온보딩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대우 받는 느낌이 어색하고 송구해서 어지러워졌던 마음이 좀 가라 앉는다. 대신 그만큼 내게 주어진 역할과 기대하는 퍼포먼스를 내는 데 집중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최근 계속 되뇌이는 말이 있다. 나만 잘 달리면 레드카펫이다. 나만 잘 달리면 레드카펫이다. 나만 잘 달리면 레드카펫이다.
“너 내 동료가 돼라"는 말의 무게를 아는 회사가 좋은 동료를 얻는다. 가만 있자, 내가 막 잘 났다는 건 아닌데...머쓱하니까 뒷부분을 “좋은 동료를 만들어낸다”로 바꿔볼까. 불과 2주 전 일기만 봐도 여전한 긴장감에 뚝딱거렸던 내 모습이 읽힌다. 그 모습이 어딘가 귀엽게(?) 느껴지는 건 딱 그만큼 긴장감이 해소됐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설렘으로 돌아왔다. 요즘의 나는 잠옷 차림으로 책가방을 멘 어린 시절의 나와 같은 마음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오늘도 잘 달려보자고 다짐해본다. 좋은 팀이 깔아준 레드카펫 위에서.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야백
발행일 | 2022년 1월 19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73호 : 👑레드카펫 위에서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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