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퇴사가 결정됐다. 어쩌면 어제

에세이 2020년 11월 25일

퇴사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다, 라는 말조차 식상하기 그지 없는 시대인데다 놓는답시고 놓는 한줌이 대단한 기회비용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보니 사실 그렇게 유난 떨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한 시절이 저무는 순간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조금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어떤 모양과 성질의 경험으로 쌓일지 지금 당장 알 길은 없으나, 그것이 내게 남긴 무언가를 잔잔하면서도 길게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노을을 보며 하루의 여운을 느끼듯이. 물론 버티다 버티다 못 버텨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원래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래 걸리는 타입은 아니다. 이번에도 그랬다. 금요일에 풀칠 멤버들과 '계속하고 싶은 일'과 '계속 다닐 만한 회사'에 대한 이야기 나눴고 주말을 혼자 보내며 고민한 뒤 월요일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차우진 님의 글을 읽으며 퇴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료 뉴스레터이기 때문에 링크를 걸거나 전문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인상 깊었던 문장 몇 개를 써본다.

“그런데 조금 관점을 다르게 하면, 그러니까 저를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하는 사람’이나 ‘글을 토대로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면 조금 애매해져요. 그래서 키워드가 ‘성장’과 ‘불안’인 것 같아요.”

“제게 ‘지속적인 성장’이란 다르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정체된 느낌’은 곧 식상한 관점과 표현이 나올 때에요.”

“글이란 생각과 관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곧 정체성의 문제고, 그건 내 위치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보는데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은 계속해서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정의가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스스로 그걸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에 이 불안감은 나의 정체성과 동일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 차우진, 숨참 뉴스레터,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점심시간, 동료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한 뒤 상사에게도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물론 이 레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가족들은 모른다.

다들 궁금해하는 건 나의 넥스트였다. 이 시국에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리 당당하게 퇴사를 결정한 거겠지.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최대한 공백 없이 이직하는 걸 목표로 이제 열심히 지원해봐야죠…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몇 번이나 인용했고 그만큼 많이 읽었으며 더 자주 떠올렸던 문장이다. 가장 아끼는 문장이기도 하다. 왜 아끼냐고? 내가 사람 다음으로 좋아하는 두 가지가 술과 글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이 문장은 완벽하게 아름답다. 얼핏 보면 술자리에 대해 쓴 글이지만 실은 그것이 인생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주로 편지에 쓰곤 했다. 수신인은 대개 삶의 한 시절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졸업하는 후배, 이별한 친구, 퇴사하는 동료… 디테일은 달랐지만 담긴 의미는 비슷했다. 치열하게 ‘다음’을 고민하되, 걱정에 잠기지 말 것. 때로 예상치 못한 불운이 불행을 불러오더라도 늘 자신의 마음을 소중하게 가꿀 것. 보면 알겠지만 사실 이건 나 자신을 향한 메시지였다.

시절과 시절이 교차하는 곳에 서 있는 누구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숱하게 있었다. 매일 밤 마주해야 했던 불 꺼진 방은 침대만큼 좁았고 우주만큼 고독했다. 매일 좁아졌고 그만큼 매일 고독해졌다.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속도가 언제나 더 빨랐다. 20대의 미숙한 경험과 통찰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거의 대부분 이뤄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쓰레기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내 생각엔 이 문장 또한 미숙한 통찰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쉰이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계획 세우기를 무수히 반복했다고 하셨으니까.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고 몇 군데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중 한 곳과 이야기가 잘 되어 입사가 결정됐다. 딱히 쉬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출근할 수 있도록 퇴사와 입사 일자를 조정했는데, 남은 연차를 태웠더니 꽤 긴 연휴가 생겼다. 뭐할지는 모르겠다. 여행을 가볼까? 거리두기 2단계구나. 친구 만나러 전국투어? 아…코로나… 업무용 툴이나 좀 공부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지막 휴가와 전역을 기다리던 말년 병장 때 기억이 조금 떠오르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과거를 털었다는 시원함, 남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떠나는 사람의 심정은 언제나 이렇구나.

아무도 눈치 못 챘겠지만 나는 조금씩 이별을 준비했다. 쌓아 뒀던 벽을 허물고, 그었던 선을 지웠다. 이 관계를 없었던 걸로 하려고?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고 싶어서. 과연 직장 동료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노. 그럼 (전) 직장 동료는? 여기에 답하려면 나름 정교한 셀프 검증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이들 개개인은 나와 성향이 맞나? 나는 이들을 어떻게 느끼나?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친구가 될 만한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제서야 무심했던 말과 행동들이 조금 후회됐다. 음, 아니. 솔직히 말해 후회는 안 했던 것 같다. 굳이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오바했네, 뭐 이 정도? 아직 어리구나. 여전히 내 기준만 고집하네. 아이고, 못난 자슥. 뭐 이런 느낌.

“저녁에 시간 안 되면 주말에 봐도 되고요.”

동료의 말과 그 말을 들은 내 반응을 보고 비로소 실감했다. 혼자 쌓았던 벽이 허물어지고 그었던 선이 지워졌다는 것이. 한 시절이 정말로 저물어 버렸다는 것이.

“아, 그러네요. 우리 이제 직장 동료 아니니까 주말에 봐도 되겠다.”

다음 시절도 어김없이 저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 시절들이 일생을 지탱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0년 11월 25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19호 : 오늘, 퇴사가 결정됐다. 어쩌면 어제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레터 19호 : 오늘, 퇴사가 결정됐다. 어쩌면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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