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성과지표
한동안 “대기업 신입으로 들어가고 싶다”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사수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아쉬움이나 불만이 가장 컸다. 직무나 분야에 대한 지식은 둘째 치고, 사무직 노동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업무처리방식(메일쓰기, 미팅, 회의, 업무량 조절, 일정 관리 등)을 터득하는 데부터 자잘한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돈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회사가 배우는 곳이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아무래도 ‘일’이란 게 인풋보다는 아웃풋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이런 ‘기본적인 업무처리방식’은 개개인의 센스에 달린 문제기도 하다. 대기업이라고 반드시 체계적인 교육 환경을 갖췄다고 볼 수도 없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어려움 또한 있을 테고.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상 그냥 판타지라는 거다. 그러니 내 푸념은 말 그대로 푸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케이, 양보. 하지만 업무처리방식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남는다. ‘일하는 사람들의 콘텐츠 플랫폼’을 기치로 내세운 ‘퍼블리’에서 메일·보고서 작성법, 시간 관리법, 상황별 마인드컨트롤 팁 같은 아티클이 꾸준히 발행되는 것만 봐도 이런 고민이 아주 특수한 사례는 아닐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비효율적 보고 체계에 답답해 하고, 비생산적 업무 지시에 열 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어떻게 일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을 끌어 안고 사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신경 쓰는 건 ‘메일 쓰기’다. 섭외나 제안이 많은 업무 특성상 먼저 메일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답장을 못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난 그때부터 온갖 불안과 자조에 휩싸인다. ‘내가 제안한 내용이 흥미를 돋구지 못 했나?’, ‘내용을 쉽게 풀지 않아서 읽다가 꺼버렸나?’,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별로였나?’ 등등. 일에 대한 평가와 인간에 대한 평가를 따로 봐야 한다던데, 그 짓을 내가 나에게 하고 있으니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억울하지도 않다. 아니, 억울할 시간도 없이 고민들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고민의 내용은 이랬다. 메일은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이다. 텍스트를 다루는 게 일이면서 동시에 취미인데(=시도 때도 없이 읽고 쓰는데), 유일한 타깃의 리액션도 못 끌어낸다면 그리고 그런 상황이 부끄럽지 않다면 일찌감치 다른 길 찾아 봐야 하는 거 아닐까. 메일 하나 설득력 있게 못 쓰는 에디터와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내 메일을 받는 사람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그 메일이 가장 와닿는 포트폴리오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많은 메일을 뜯어봤다. 제목은 어떻게 쓰는지, 인사는 어떻게 하며 메일 수신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프로젝트 진행하느라 고생 많으셨다’ 같은 스몰토크는 어느 정도 사이일 때 하면 좋을지, 문단은 어디서 나눌지, 어떤 순서로 내용을 전달할지, 마무리 인사는 뭐라고 할지, 심지어 ‘감사합니다.’와 ‘아매오 드림.’ 사이 한 줄을 비울지 말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까지 살폈다. 포트폴리오를 조금씩 고쳐가듯이 새로운 메일을 보낼 때마다 여러 요소를 넣거나 빼곤 했다.
그 날도 출근해서 보도자료를 비롯한 여러 메일을 읽었다. 오전 업무를 마친 뒤에는 모 브랜드 홍보담당자와 점심을 먹었다. 꽤 오랫동안 메일만 주고받았는데 어쩌다 기회가 닿아 처음 얼굴을 마주한 자리였다. 이런 저런 대화(회사 일 말고도 뭘 하긴 해야 할 거 같은데 뭐 해먹고 살죠? 웹소설을 써볼까요?)를 나누던 중 경력 얘기가 나왔다. 쪼렙인 나는 쭈뼛쭈뼛 ‘이제 좀 있으면 만 1년이 된다’고 털어놨다.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마시던 그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엥? 저는 메일 쓰는 거 보고 그래도 3년차는 된 줄 알았는데.”
안다. 나도 안다. 립서비스가 아닐 리 없다는 거. 그에겐 메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이 전부일 테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립서비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일말의 진심 또한 포함돼 있었으리라 믿는다. 음, 오케이. 양보. 이렇게 하자. 그건 적어도 그때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불안감에 흔들리는 나를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딱 적정량의 칭찬. 그의 말 한 마디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좋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내가 아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니구나’ 라고 여길 작은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내게 메일은 포트폴리오와 같았다. 일종의 바로미터다. 내가 ‘내 일’에 얼마나 욕심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라 여겼다. 근데 어디 메일만 그럴까. 모두 저마다의 성과지표 하나씩은 갖고 있다. 일하면서 특히 신경 쓰게 되는 것, 그걸 달성하기 위한 노력.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듯 보여도 누군가에겐 어떤 지속가능성을 부여해주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이 모여 안 되는 일을 되게 한다고 믿는다.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0년 7월 22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2호 : 나만의 성과지표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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