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직장인

아카이브 2020년 12월 16일

어릴 적부터 ‘착하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그것이 텍스트 그대로 선하게 생겼다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마땅히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타인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착하게 보일 법할 행동을 곧잘 하곤 했다. 이를테면 의자 정리나 쓰레기통 비우기 같이 사소하고 남들이 귀찮아하는 것들.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 실제로는 못생겼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거란 사실은 꽤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기랄.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했다고 해서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었다. 일단 나의 못생김은 그리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분한 마음에 대뜸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갑자기 얘가 왜 이래’라며 반감만 얻을 게 뻔했다. ‘그래, 못생기면 착하기라도 해야지’라는 통렬한 자기반성 뒤에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주변에는 나처럼 ‘착하게만 생긴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심성이 고운 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그들은 무엇을 받든 늘 곱절을 주었다.

문제는 나이를 먹고 사회에 나와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처럼 착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긴코원숭이뿐이라면 좋으련만(으 끔찍), 잘생기고 잘난 것들이 즐비했고(다행이다) 성미가 사납고 괴팍한 짐승 같은 놈들도 잔뜩 있었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정글에서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모두가 내 맘 같을 순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사회생활 초기에 유독 바쁜(척하는) 사람과 프로젝트를 함께 할 때마다 진이 빠졌다. 나이가 어려서 우스워 보였던 걸까. 아니면 내 경력이 하찮아서였을까. 진행하는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인데도 감감무소식이었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늘 내 몫이었다. 한껏 공손한 태도로 두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부탁을 해도 바쁘다는 매정한 말 한마디에 소득 없이 돌아간 적도 많았다.

‘바쁘신 건 잘 알겠는데, 우리, 팀 아니었어요? 같은 프로젝트 하잖아요?’라며 터져 나오려는 말을 목구멍 안으로 애써 삼킨 적도 자주 있었다. 무슨 일하는지 뻔히 다 아는데. 자기만 일 많은 척 바쁜 척 연기하는 게 월급에라도 포함된 건가.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과 부대끼며 호되게 당할 때마다 ‘착하면 호구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체감했다.

“아니, 같은 프로젝트를 하면 서로 으쌰으쌰 하면서 돕는 게 이상적인 팀플레이 아니냐고요. 세상에서 지들이 제일 바빠.”

어느 주말, 친한 선배를 만나 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두어 시간 이어진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사회생활 만렙의 영민한 선배는 의외의 조언을 건넸다.

“그럼 이 악물고 나쁘게 한 번 말해봐.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말하다 보면 너만 힘들어져.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 될 때도 많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랬다. 행여 상대방의 기분이라도 상할까 싶어 에둘러 말하다 보면 정확한 요구 사항을 온전히 전달하기가 힘들었다. ‘에... 그러니까 금요일까지 달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죠...?’ 이런 식으로 선택권을 무한대로 주며 말하다 보면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마감일은 늘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저 친절하게 말하려 했을 뿐인데,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내 태도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메시지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문제는 메신저인 내 쪽에 있었던 거다.

문제의 원인이 나의 태도 혹은 말버릇인 걸 알고도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마치 정권 지르기라도 하듯 말도 내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에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냈다. 착하게 (못)생긴,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인상을 적극 활용하는 거다. ‘에... 그러니까 무리한 부탁인 건 아는데 금요일까지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제발요...’ 가끔씩 고달플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전략인 것을.


Credit

글 | 파주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0년 12월 16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22호 : 나쁜 직장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레터 22호 : 나쁜 직장인


다른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으신가요?

풀칠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매주 수요일 자정, 평일의 반환점에
새로운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구독하기

Copyright ©풀칠 All Rights Reserved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