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다면 좋았을 것들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아매오입니다.
회사 다니다 보면 별 장면을 다 목격하고 별 얘기를 다 듣습니다. 어쩌다 알게 되는 바람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불편한 진실, 누군가를 마냥 좋아할 수도 혹은 마냥 싫어할 수도 없게 만드는 사연. 이런 것들을 통해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복합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돼 버렸을 때 우리는 조용히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읊조리죠. 바로 그런 경험에 대해, 그것이 나에게 불러온 변화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어떤 걸 써볼지 한참 고민하던 중 머릿속에 누군가의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나는 모르겠으니까 그거 그냥 아빠가 해줘요.”
여기서 ‘나’는 제가 다니던 회사의 상사 중 한 명입니다. ‘그거’는 그가 맡은 업무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여기서 뜬금없이 ‘아빠’라니요. 이 어색한 조합의 짧은 문장 하나가 사무실의 모든 움직임을 일순간 멈춰 세웠습니다(흔히 ‘귀신 지나갔다’라고 하죠). 곧바로 원상복구됐지만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날 점심시간 스몰토크는 그 한마디에 관한 추측으로 채워지지 않았을까요?
그는 부하 직원들에게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성격 등에 대한 평판을 차치하더라도 상사란 원래 좀 불편한 존재죠. 누구든 자신이 작업한 결과물에 대한 컨펌 권한을 갖고 있는 이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고, 눈치를 살피는 한 아무래도 그를 대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건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뒷담화하며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한 수 접어주는 것’이라는 위안을 얻는 일뿐이었죠.
단 한 마디가 그를 대하는 제 태도를 바꿔놨습니다. 철없는 대학교 선배를 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불편한’에서 ‘철없는’으로 바뀐 것은 그와 저 사이의 눈높이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상사’에서 ‘선배’로 바뀐 것은 더 치명적이죠. 아예 정체성이 교체돼 버렸으니까요. 물론 현실의 그는 여전히 제 상사지만 그를 바라볼 때면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배역을 맡은 배우의 (잘하지도 못하는) 연기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이미지가 바뀌면 그를 대하는 행동도 바뀝니다. 언젠가부터 저 자신이 그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는 더 이상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편해진 것도 아닙니다. 뭐랄까. 그는 그냥 거기 존재했습니다. 이해 안 될 지시를 하면 ‘이해 안 될 지시를 하는구나’ 싶고 화를 내면 ‘화를 내는구나’ 싶은 거죠. 그와 엮인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제가 보기에도 눈에 띄게 느슨해졌습니다.
불편한 상사는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의 최저선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완벽히 역할놀이로 받아들인 셈이죠. 불편한 상사를 마주친다면 오히려 그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이후로 모셨던 어떤 상사에게도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료들과 나누는 뒷담화도 줄었죠. 그리 즐겁지 않았으니까.
장점은 분명했습니다. 감정 소비가 극도로 줄었죠.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힘 빼지 않으니 (대부분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그저 ‘투 두 리스트’만 외로이 남았습니다. ‘이건 오늘 하고, 저건 내일 하고’ 정도만 신경 쓰면 되는 간단한 곳이 저의 밥벌이 세계였습니다. 가끔 희열에 휩싸이거나 분노에 가득 차기도 하지만 그건 어떤 현상이나 집단을 향한 것이었죠.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그 상사가 거기서 통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분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아빠한테 해달라고 성질부리는 자식이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포함한 상사들에게 여전히 불편함을 느꼈을까. 긴장감을 가졌을까. 만약 그랬다면 더 열정적으로 일했을까. 느긋하고 욕심 없는 편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은 안 되지 않았을까. 을까, 을까, 을까…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생각하는 일은 현재 나를 이루는 요소 중 가장 아쉬운 것의 기원을 찾아가 혹시 존재했을 삶의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상상일 뿐. 우리는 아는 것을 통해 일궈온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앞으로의 삶 또한 앞으로 알게 될 것들로 만들어 갈 거고요. 나중에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러면 또 뭐 어떤가요. 한 번 더 상상하고 다시 나아가면 되지.
그러니 여러분도 잠깐 시간을 내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추신
야백 : 상사 통화를 엿듣는 것도 모자라서, 그때부터 상사를 철없는 선배라고 여기다니. 정말 되바라진 직원이군요. 아매오 님의 편지를 읽고 나니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인 자아를 노출하는 게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경각심이 들어요.
그런데, 여러 개의 자아가 섞이지 않도록 한 평생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피곤하지 않나요? 하나의 자아로도 그럭저럭 잘 지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다양한 역할극에 참여하게 된 건지. 이 피로한 역할극을 이해하게 된 것이 제겐 ‘몰랐다면 좋았을’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파주 : '그냥, 아빠, 해줘요'라는 세 어절로 한순간에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될 수 있다니, 엄청난 경제성을 가진 단어의 조합이네요.
친구가 아닌 우리, 그러니까 일을 하는 사이끼리 형성된 관계성이란 이렇게나 중요하군요. 지금 회사에서 저는 어떤 사람처럼 보일지 새삼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팀원들 앞에서 ‘출근하기 싫다’와 ‘집에 가고 싶다’를 교대로 내뱉는 저는 과연… 젠장, 이 글을 몰랐다면 좋았을걸 싶네요.
아매오 : ‘몰랐다면 좋았을 것들’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 속 한 단락입니다. 작가는 누군가의 집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그 내용은...책에서 확인해보시죠.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겐 술이 ‘몰랐다면 좋았을 것’일 수 있겠네요(저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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