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어른
동료와 함께 홍대로 미팅을 나간 날이었다.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함께 가야 하는 다음 일정 또한 외부였으므로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검색해서 찾은 라멘 맛집을 향해 가는 길에 카페를 하나 지나쳤다. 언뜻 보기엔 그저 그런 인테리어에 접근성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서 금세 사라질 것 같은 곳이었다. 특히 홍대에서 그런 경우는 너무나도 흔했으니까. 저게 근데 원래 저 자리에 있었나? 자주 지나다녔었는데, 여기.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동료가 정확히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괜찮아요. 사장님이 커피를 오래하셨던 분인데 꽤 유명해요.”
홍대라면 나도 좀 아는데. 내심 뻘쭘함을 숨기기 위해 애써 고개를 뒤로 돌려 카페를 쳐다봤다. 안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 쪽으로 머쓱한 눈길을 던지며 “글쿤요. 저는 잘 몰라서 혼자 왔으면 들여다 보지도 않고 걍 지나쳤을 듯. 역시 아는 만큼 보이네요.”라고 중얼거렸다. 밥을 먹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자연스럽게 그 카페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겠지만 방금 전의 일도 있고 하니 시그니처 메뉴인 비엔나 뭐시기를 시켜봤다. 과연 납득 가능한 맛이었다.
“커-피-”라고 발음할 때면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성인이 된 지 이미 1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그렇다. 왜냐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서. 커피의 쓴맛을 즐기는 어른이 된 스스로를 상상하던 당시에는 그 중독성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른스러움'의 일부로 여겼다. 그것 참 제멋대로인데다 터무니없는 아이로군. 하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미래를 상상하는 감각’은 지금과는 달리 훨씬 긍정적이고 충만했던 것 같다. 앞으로의 삶은 어느 쪽으로 어떻게 흘러갈까? 모든 길이 열려 있던 시기였다.
앞으로의 삶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직도 확신할 길이 없다. 다만 예상대로 하루에 두 잔 정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됐다. 아침에 눈 뜬 다음 일터에 나가기 전에 이미 세 잔을 클리어하는 엄마 덕분일까. 이걸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쓴맛은 물론 산미까지 탈탈 털어 넣을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랐다. 더운 여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침에 한 잔, 점심에 한 잔, 졸음이 쏟아지는 늦은 오후에 한 잔 더. 어른? 물론 이제 다 아시겠지만 그거 별 거 아니다.
어른에 대해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책이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내 나이 스물하고도 두 살 때. 40대인 작가가 30대였을 때, 자신의 20대를 떠올리며 쓴 책을 읽는 기분은 참 묘했다. 각각 다른 나이의 작가는 저마다의 시간대에서 내게 필요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삼십대가 되었다. 거의 10년의 시간을 돌아서 다시 펼쳐 든다면, 『청춘의 문장들』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줄까? 답답할 때면 나보다 앞서 살았던 이의 문장을 읽는다는 작가의 말에 담긴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2004년에 출간된 『청춘의 문장들』 10주년을 기념해 2014년에 『청춘의 문장들+』가 나왔다. 나는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샀는데, 무려 1판 1쇄였다. 책에는 인쇄일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날짜와 함께 적힌 메모가 있었다. ‘용준'이라는 선배가 ‘대원'이라는 후배에게 책을 선물하며 보내는 응원이었다. 책이 중고서점에 팔려나온 사연이 뭔지는 몰라도 메모를 보자마자 갖고 싶어졌다. 이것은 또한 ‘어른’이라는 의미를 다른 형태로 담아낸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의미 부여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상을 온갖 것으로 쪼개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미의 불모지에서 붉은 꽃, 푸른 꽃, 새벽의 구름 꽃, 사랑이란 정원에 흐드러지는 웃음 꽃... 아니 이건 노래 가사고. 하여튼 그런 것들을 피워내면서 우리는 커피도 한 잔 하고 술도 한 잔 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커피 한 잔, 술 한 잔, 책 한 권 사주는 것밖에 없지만 그게 어디냐 이 말이다. 어른이 필요한 시대라면, 그런데 어른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어른이 돼 주자.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2년 2월 9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76호 : ☕️커피와 어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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