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무 끝에 통찰 온다

아카이브 2020년 12월 23일

“일은 어때?”

최근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퇴사와 이직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상대 입장에서도 인사치레 소재로 이만한 게 없었을 테다. 어쨌건 아예 무관심은 아니라는 뜻이니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때문에 항상 성심성의껏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냥 뭐 할 만해요’나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 같은 말은 되도록 피한다. 최대한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물론 TMI가 되기 전에 멈추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일은 어떻냐고? 전 직장과 비교하면 일의 내용, 형태, 템포, 밀도 측면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내용과 형태는 그 범위가 넓어졌고, 템포와 밀도는 높아졌다. 게다가 아직 일의 전체 프로세스를 경험하지 못해 일정 관리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조금 정신사나운 상태로 우당탕탕 업무를 훑고 가는 경우가 많다. 불만을 가질 틈도 없다. 불만이 생긴다는 건 적응 끝이라는 신호이니 오히려 굿뉴스다.

격무는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능력이든 경험이든 내 수준을 상회하는 순간 그 일은 별 수 없이 몹시 고된 업무가 된다. 아유 힘들다…하면서 조금씩 판단을 내린다. 이거 할 수 있긴 있겠다 혹은 난 이거 못해ㅠ 물론 이미 가진 것을 바탕으로 미지의 영역을 잘 헤쳐 나가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이 가진 힘을 통찰력이라고 한다. 나는 못 가진 것 같다.

미지의 영역을 잘 헤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초여름 나는 ‘보고 배울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 가본 길에 멋대로 내딛는 발걸음이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 탐탁치 않았다. 사수가 없어서 짱난다! 백날 외치고 다닌다고 훌륭한 사수가 뿅하고 등장하는 게 아닐 텐데도 한동안 고민이랍시고 들고 다니며 여기서 쫑알쫑알 저기서 쫑알쫑알 돌아다녔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을 해줬다.

“사수가 없어서 느끼는 불안함은 차라리 잘 맞지 않는 사수 때문에 생기는 답답함보다 훨씬 나아요. 자, 좋게 생각해봅시다. 사수 없이 크는 사람은 새로운 길을 혼자 가보는 감각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 생각에 그건 지금 같은 시대의 콘텐츠 기획자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역량이에요.”

‘보고 배울 사람이 없어서 불안하다’를 ‘새로운 길을 혼자 가보는 감각’으로 재정의한 게 인상깊었다. 그리고 좀 부끄러웠다. 나는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고민을 존재하지도 않는 사수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통찰력은 가이드라인을 따라간다고 얻을 수 있는 보상 아이템이 아니라 부딪히고 깨지고 아물고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서 격무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격무에 ‘잘’ 시달려본 사람만이 통찰력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유레카! 잘 나가는 일잘러들이 인터뷰만 하면 짠 듯이 ‘워커홀릭’과 ‘번아웃’의 경험을 토로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그냥 말도 안 되게 일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프로세스를 최적화하면 그 수준을 감안해 더 많은 더 중요한 일이 배정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내가 속한 조직 자체가 요상한 체계로 굴러가는 중일 수도 있다. 또는 구성원 중 하나가 영악하게 자기 일을 동료들에게 외주 맡기듯 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기를 잘 넘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의 주도권을 쥐고 싶다. 일에 내 일상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한 조각으로 일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꼭 필요한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알맞은 방법과 효율적인 리소스 관리를 통해 적절한 성과를 내는 한편 돌발적인 이슈에 침착하게 대응할 만한 역량을 원한다. 더욱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좋은 동료가 되어 팀으로 성과내는 경험을 쌓아가면 좋겠다.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0년 12월 23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23호 : 격무 끝에 통찰 온다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레터 23호 : 격무 끝에 통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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