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라는,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진 맙시다
결국 번아웃이 찾아왔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기미는 있었다. 매주 수요일쯤 되면 탈진이 찾아왔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거의 좀비처럼 죽지 못해 업무를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누가 나에게 맡겨둔 것 마냥 대형 프로젝트가 내 앞으로 밀려왔다. 어렵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속으로 앓으며 야식을 먹듯 야근을 해야 했다. 어느 정도 내 욕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놈의 완벽주의. 일은 많은데 꼼꼼하게 처리하고 싶은 맘에 늦은 밤까지, 어떤 날은 새벽까지 업무를 붙들고 있었다. 마치 대학생 시절 과제를 해치우듯이.
하필, 이라고 해야 할지 때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대형 프로젝트를 앞둔 월요일 아침. 눈을 뜨면서 단박에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침부터 손발에 힘이 없어서 겨우겨우 출근과 아침회의를 마쳤고 무척 창백한 얼굴로 팀장에게 내 상태를 알렸다. 병원에 다녀오라던 팀장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집에 가서 쉬라는 얘길 해줬다. 이직 후 처음으로 낸 병가였다. 코로나 걱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래도 호사스러운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정확히 내가 겪었던 경험이 번아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말 그대로 ‘번아웃’이라는 말이 내 상태에 가장 적절한 표현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한 데 집중하기 어려웠고 두통과 매스꺼움이 찾아왔다. 온 몸이 퉁퉁 붓는 것과 동시에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번아웃, 더 정확하게는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치면 각종 글이 쏟아진다. ‘풀리지 않는 피로’, ‘20대 번아웃’, ‘번아웃 진단법’, ‘무기력증 극복하기’ 등등. 비단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마 주니어 직장인들에게 번아웃 증후군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때 내가 풀칠 멤버인 파주님의 집에 기거하는 동안 우리는 사무실에서 챙겨먹어야 하는 영양제며 도수치료의 효능 따위를 공유하곤 했으니까. 어느 밤엔가 둘 다 퇴근 후 몹시 지쳤고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다음 날 출근이 걱정돼 캔에 든 탄산음료로 건배를 했던 밤이 생각난다.
대학생 땐 어른들에게서 젊을 땐 사서 고생하는 거라던 얘기를 자주 들었다. 대전에서 일하며 남들보다 뒤쳐져있다고 열등감을 느끼던 시기에는 젊을 때 고생해야 노후가 편하다는 얘기가 그렇게 뼈아플 수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일하면서 남들과 겨우 비슷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내 몸을 얼마나 혹사시키고 있었는지,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았다.
병가를 내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아주 가까운 미래만을 보고 있었구나, 하고. 당장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장 가까운 시일에 내 업무에 대한 평가는 좋을지 몰라도,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방식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건강’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아야지, 되새기며 혼곤하게 잠에 들었다.
병가 다음날인 화요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프지 말자.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Credit
글 | 마감도비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0년 11월 4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16호 : '건강'이라는,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진 맙시다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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