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시 시작한 게 있나요?

에세이 2025년 7월 23일

야백: '다시 시작'이라. 요즘 저는 야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야식(야근 후 식사)도 다시 시작했고요. 그러다 보니 다이어트도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것 참 다시 시작한 게 많네요.

다시 시작한 세 가지 중 야식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해볼까요. 먹고살려고 일하는 사람에게 먹는 게 낙이 되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요즘엔 좀 너무 먹는다 싶습니다. 입맛이 완전히 돌아버렸어요. 자기 전에 다음 날 뭘 먹을 건지 생각해 두고 잔다니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커피를 내리고요. 점심시간 1시간 전부터 네이버 지도에 별표를 쳐둔 회사 근처 맛집들 중 어디를 가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오후엔 젤리 한 봉지를, 저녁엔 야근해야 하는 팔자를 저주하며 시뻘겋고 불맛이 나는 마라샹궈나 야채곱창 같은 녀석들을 시킵니다. 출근한 지 14시간이 넘으면 슬슬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죠. 법카로 부른 택시를 타고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에서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아, 오늘 하루도 참 많은 사람들을 욕했구나. 오늘도 많은 일들을 조졌어. 세상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망가졌어. 참회할지어다. 참회하는 마음에는 왠지 차갑고 하얀 것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아. 하루의 마무리는 요아정.’

예, 물론 저도 압니다. 이렇게 살다 간 머잖아, 필연적으로 성인병을 갖게 된다는 것을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저는 이미 성인인걸요! 죽음이라는 필연이 있기에 삶에도 의미가 생기듯이, 저는 성인병이라는 필연이 있기에 몸이 아직 완전히 고장 나기 전인 이 찰나의 시절을 더 처절히 음미할 수 있다고 생각하렵니다. 궤변인가요.

재밌는 점은, 아침이 오면 곱창과 맥주에 절어 방탕하게 위산과 인슐린을 써버리는 파락호는 온데간데없고, 내면의 평화와 커리어의 성공을 동시에 노리는 야심맨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야심맨은 저속노화 유튜버가 알려준 대로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뇌과학자 유튜버가 알려준대로 정수리에 볕을 좀 쬐어줍니다. 그리고 요가 음악을 틀고 책을 읽다 출근을 하죠.

그러니까 저는 지킬박사와 하이드도 아니면서 야근과 야식, 다이어트와 운동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있는 잔잔하게 미쳐버린 일상을 살고 있는 겁니다. 야근도 다시 시작, 야식도 다시 시작, 운동도 다시 시작, 다시 시작….

그래도 가끔은 야근이 없는 날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 야근 안 한 날엔 친구랑 술을 한 잔 했는데요. 친구는 제게 요즘 ‘어떤 문제를 풀고 있냐’고 묻더군요. (이 ‘문제를 푼다’는 표현은 아마도 실리콘밸리의 기술 엘리트 놈들이 유행시킨 것 같은데요. 삶의 모든 문제를 정량화해서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해결해 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이 기저에 깔려있는 게 느껴져서, 저는 이 표현이 좀 재수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야근과 야식, 다이어트와 운동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이 친구가 또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문제와 현상은 구분되어야 한다면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면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고깝긴 했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죠. 너는 요즘 어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냐고. 친구가 말했습니다. “연봉이 낮아” 그리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이렇게 덧붙입디다. “근데 또 회사는 어려워.” 남일 같지 않더군요.

친구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풀고 있는 문제는, 여태껏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문제는 바로 생존이라고요.

제가 먹는 낙으로 도피해서 배달음식을 퍼먹는 이유는 아마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스트레스를 무의식에서 이상하게 코딩한 결과일 겁니다. 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다시 시작’을 결심하는 운동과 다이어트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음모고요. 내면의 악마와 천사가 숙주인 제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번갈아가면서 배달과 운동을 시키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언젠간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요?

물론 햇볕이 좋고, 구름이 멋진 날에는 저도 ‘다시 시작’이라는 말에서 밝은 면들을 많이 읽어내곤 합니다. 자꾸자꾸 새로워지려는 마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마음! 이 마음을 조금씩 사용하며, ‘다시 시작’이라는 자맥질을 씩씩하게 해 나가는 게 시간의 바다를 유영하는 존재로서의 도리겠죠. 풀칠러님은 부디 문제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순풍을 만난 시기를 보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자, 저는 이렇게 지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야근도 하고 야식도 먹고 다이어트도 하면서.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분명 저희 <풀칠>의 애독자이실 테니, 아매오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조금은 궁금하실 것 같네요. 다음 차례는 아매오입니다.

아매오: ‘다시 시작하는 것’을 비틀어 생각한 야백의 이야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뭔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 그럼에도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떻게든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 어딘가 작심삼일을 3일에 한 번씩 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뭔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있다는 것. ‘한참 좋았을 때의 나’를 레퍼런스 삼아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쩐지 반대 방향으로 내달려 같은 지점에 도착한 느낌도 드는데요.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지난 2개월 동안 워크숍에 참가했습니다. 내 이야기로 출판물을 만들고 세상에 내보이는 법을 배웠어요. 저는 지금껏 풀칠에 실었던 글을 엮었습니다. 밥벌이 5년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요. ‘읽기’나 ‘쓰기’ 혹은 ‘뉴스레터 만들기’와는 또 다른 감각. 비록 기한 내에 완성하진 못했지만 마치 평생 안 써온 부위의 근육을 PT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처음 움직였을 때처럼 신선한 자극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건 ‘다시 시작한 게 있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워크숍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제가 다시 시작한 건, ‘새로운 사람 만나기’입니다.

원래 새로운 사람 만나기를 즐겼습니다. 서울에 올라오면서(=기존 지인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지면서) 더욱 그런 일에 매달렸죠. 각종 모임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렸고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티타임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인연을 현재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커뮤니티 서비스를 애용하다 못해 그쪽으로 취직까지 해버리고 말았죠.

돈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그런 활동들은 제 일상에서 사라집니다. 기존 지인들조차 ‘1년에 2~3회 만나는 사람’ 혹은 ‘1년에 1회 만나는 사람’ 등으로 그룹화했어요. 요 몇 년간 제 인간관계에는 일로 만난 사이를 제외하면 뉴페이스가 없었습니다. 별로 아쉽진 않았습니다. 돈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은 그런데도 계속해서 커져만 갔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 워크숍에 갔느냐. 워크숍 운영자가 앞서 언급한 ‘그렇게 만난 인연을 현재까지 이어오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조만간 또 만날 분이었고요. 이왕이면 상대에게 도움 되는 방식이 좋겠죠. 무엇보다 그것이야말로 돈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이처럼 계산기 두드려 도출한 결과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독립출판 워크숍인 만큼 참가자들은 꽤 넓은 범위에서 기획합니다. 글 한 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책 한 권을 구성하려면 자기 인생의 한 시절을 정의하는 테마 정도는 다뤄야 하죠. 덕분에 저마다의 희로애락이 잔뜩 묻어난 경험을 다양하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 그것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앞으로의 삶을 잘 디자인해나가길 바라는 마음들이 곧바로 제게 와닿더군요. 마치 그게 제 마음인 것처럼.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묵혀두고 못 본 척했던 위시리스트가 머릿속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습니다. 이건 서울에 올라와 처음 나간 독서모임에서 느꼈던, 그래서 저를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에 중독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부분 중 하나가 다시 한번 ‘빛났던 그때’처럼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시작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지나온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내게 긍정적 영향을 줬던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걸 기대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우연히 다시 시작한 데서 또 다시 만날 수도 있죠. 요즘엔 ‘다시 시작할 만한 것’이 또 없을까 싶어 과거를 조금씩 들춰보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리뉴얼이 현재의 나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해소할 수단이 돼 줄지도 모르니까요.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말이 너무 많았나요? 더 무슨 말을 할까 싶나요? 기억하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기어코 자기의 얘기를 어찌저찌 꺼내놓곤 했습니다. 네. 그러니 이번엔 파주 님의 얘기를 읽어보실까요. 그는 무엇을 다시 시작했는지.

파주: 네, 접니다. ‘다시 시작'이라고 하면 이미 전에 해보았던 일 / 모종의 이유로 잠시 멈춘 일 / 또 어떤 일로 마음을 잡고 착수하려는 대상이라고 봐야겠군요. 먼지 쌓인 러닝화 끈을 고쳐 매거나, 벽돌책을 백팩에 집어넣는 식의 비장한 장면이 떠오르지만요. 출근하는 평일과 누워있는 주말을 반복하는 제 경우엔 좀 더 건조합니다. 다시 시작한 건 다름 아닌 ‘제안’입니다. 네, 그 제안. 기획, 아이디어, 다시 회의, 피피티…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부르는 그 제안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거창한 플랫폼도, 팔릴 만한 물건도 없습니다. 그저 구성원들의 두뇌를 쥐어짜는 일로 먹고사는 곳이죠. 그러니까 돈이 되는 일을 만들기 위해선 ‘제안’이란 걸 주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벌써 그 시즌이 왔네요.

풀칠하시는 분들이라면 모두 아실 겁니다. 남의 돈 벌어먹는 거, 그게 어디 쉽나요? 제안이 잘 팔려야 하고, 팔려면 말이 그럴싸해야 하며, 말이 그럴싸하려면 어딘가 약간은 구라여야 합니다. 가끔은 말장난 같고 때론 반쯤 거짓 같은 아이디어를 PPT에 얹어 클라이언트를 홀리는 거죠.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단 한 마디입니다. “좋은데요? 이걸로 가시죠.” 그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화이트보드 앞에서 머리를 박습니다. (진짜, 물리적으로요.)

물론 클라이언트에 닿기도 전부터 수많은 '내부 컨펌'이 존재합니다. 킥오프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들이미는 순간은 공포영화가 따로 없는데요. 팀원들은 각자 뭔가를 씹는 표정을 한 채로 모니터를 바라봅니다. 전날 밤 잠들기 직전엔 확신했습니다. 이번 제안은 이걸로 게임 오버라고.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보면 끔찍하죠. 비장의 웃음포인트인 장표였는데 다들 숙연하고, 떨리는 목소리는 점점 염소소리가 되고... 12시간 전에 기깔나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는 선 채로 사망 선고를 받습니다.

초반에는 제안 시즌마다 매번 무너졌습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자괴감에 붙들려 살았죠. 근데 지금은? 입사 3일차 / 3년차 짤처럼 뻔뻔해졌습니다. 웃기긴 한데 맥락이 없다거나 현실성이 떨어져서 아쉽다는 반응으로 아이디어가 기각되면 되묻습니다. ‘뭐 어쩌라고용, 이런 거 내라고 절 뽑은 거 아닌가요?’

팀원들이 죄다 똑같은 아이디어만 낸다면 그건 회의가 아니라 거울방입니다. 그래서 제안을 할 때는 제멋대로 생각하려 애씁니다. 저마다 자기다운 아이디어를 들고 올 테니까요. 내가 하는 게 허튼 소리 같아도 일단 토해내는 겁니다. 뭐, 어떤 평가를 받더라도 아무 말 않는 것보단 낫겠죠.

솔직히 이번 제안에서 떠든 말이 얼마나 쓸모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요. 어차피 조만간 다음 제안을 준비할 테니까요. 당장 이번 제안이 수주하지 못한다 해도 회사가 파산하진 않을 거고, 제 인생도 망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아, 물론 실주가 계속되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해요.

추신

  1. 마감도비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죽은 건 아닙니다. 단지 최근에 이직을 했을 뿐.)
  2. 야망도 잃고 이제는 백수도 아니게 된 야망백수는 ‘야백’으로 닉네임을 바꿨습니다. 악뮤로 이름을 바꾼 악동뮤지션의 심정은 이와는 달랐을 텐데…
  3. 사실은 2025년 1월에 다시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시작’이라는 게 참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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