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외향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에세이 2021년 12월 8일

MBTI 스타디움에서 요즘 가장 핫한 경기는 S와 N의 승부라고 하지만 요즘 내 하루를 가로지르는 고민은 I와 E의 경계에 서있다. 외향이냐 내향이냐.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나는 사람이 정말 어렵다. 나는 I형 인간, 지극히 내향적형인 인간이다. 늘 낯을 가리고 사람 대하는 걸 조심스러워한다.

그리스 비극을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흠결로 인해 늘 일을 그르치지 않나. 비극도 이런 비극이 따로 없지. 말수가 적고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어쩌다보니 늘 사람과 부대끼는 직업을 가지고 말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사하고 밥을 먹고 전혀 모르는 외부 조직에 전화를 걸어 질문을 하고 때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 내밀한 속내를 이끌어 내야 하는 일이다. 이름도 마감도비지만 마감의 8할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물론, 서당개는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마감도비 노릇이 해를 거듭할수록 일이 조금 손에 익기도 한다. 한숨을 푹푹 쉬다가도 통화버튼을 누르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외향적인 인간이 된다. 잘 지내셨느냐, 요즘 일을 좀 괜찮으시냐, 못 본지 오래 됐다 등등 간간히 멘트 양념을 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너스레를 떨다보면 늘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전화로 온갖 너스레를 떨며 이제 연말인데 한번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그쪽 회사 근처로 가겠다고 빈말을 내뱉다가 상대가 “저, 마감도비님, 저희 O일에 뵙기로 약속 잡지 않았나요?” 라고 말하며 헛웃음을 짓기에 “아아.... 그쵸, 그쵸. 제가 너무 설레서 그만. 하하, 하하하”라고 답했지만 정말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풍월에 너무 무아지경이었던 셈이다.

내 생각에 자의건 타의건 I형 인간도 E형 스위치 하나씩은 지니고 있는 거 같다. 사회생활용 페르소나와 비슷하지만 그거보다 좀 더 절박한 의미를 지닌다. 뭐랄까, 일종의 필살기 같은 거다. 소년 만화를 보면 천재들 사이에서 노력형 캐릭터가 딱 한 번 남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필살기가 있지 않나.

이걸 쓰면 너는 일시적으로 그 누구보다 외향적인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수명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 것이다... 과장이 심하지만 대충 그런 리스크를 가진 비기(秘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매일 필살기를 쓴다. 한낮에 어색한 사람들과 밥을 먹고 업계에 떠도는 소문, 전 직장 험담, 재태크 꿀팁, 사는 얘기를 하며 한참을 떠들고 웃는다. 빈말, 과장된 웃음, 어색한 몸짓, 정직한 침묵. 몇 번의 반복. 쓰나미가 여러 번 나를 휩쓸고 지나가면 하루가 모두 흘러가있다.

일행들과 길을 나서서 나란히 대로변에 서면 모든 극이 막을 내린다. “아, 네, 저는 이쪽으로 가려구요. 저기 택시 오네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람 좋은 미소와 정중한 허리 인사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돌아서면 어디 전봇대 옆 쓰레기봉투 옆에 잠시 쭈그려 앉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아, 빈말을 너무 많이 했어, 티가 나면 어쩌지, 그 말은 하지 말걸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압도하는 피로감.

I형 인간도 사회 생활을 하면 E형 인간이 된다. 대신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E의 모든 획이 I로 길게 줄지어 서면서 그 길이만큼 자괴감과 피로감도 길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고민을 하게 된다.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하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랑 맞지도 않는 직업을 골라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등등.

그런데 최근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거래처(라고 하자)의 누군가가 내가 미국 출장으로 간 줄 알았던지 몹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플랑크톤인지 오미크론인지 하는 게 심해서 현지 상황이 안 좋다는데 나더러 미국에서 괜찮냐는 거였다. 금방 오해를 바로 잡았지만 I형 인간인 나는 그게 또 너무 고마워서 한동안 그 걱정을 머플러처럼 두르고 다녔다. 따뜻하게.

I형이어서 사람으로부터 오는 타격도 크지만 동시에 수혜도 컸던 셈이다. 밥은 드셨어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아프지 마세요, 저번에는 감사했습니다, 큰 도움이 됐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등등. 아직은 어색한 미소 사이로 흘러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채워준 말들이다. 그리고 한 번 들어본 말은 나도 다른 사람에게 하기 쉽다.

외향적 천재들 사이에서 노력형 외향형인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나에겐 필살기가 있으니까. 어느 순간엔 나도 가장 진심으로 외향적인 인간이고, 그 순간이 쌓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모두들 나의 진심을 받아줘..!


Credit

글 | 마감도비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1년 12월 8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69호 : 딸깍, 외향 스위치를 눌렀습니다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레터 69호 : 딸깍, 외향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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