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다!
"언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 다음주 말쯤......"
"다음주 말 언제?"
"목요일이요."
"목요일은 너무 늦지 않을까요? 빨리 돼야 할 것 같은데."
"다른 프로젝트에 걸린 것도 있어서 바로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화요일에는 돼야 하지 않을까?"
"네......그럼 일단 화요일에 전달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드디어 회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팀장 입에서 떨어졌다. 1시간으로 예정됐던 회의시간이 막 2시간을 넘어가는 참이었다. 분명 다음 타임에 회의실을 예약한 팀이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도 오지 않은 건지. 덕분에 매오는 회의 후반부 한 시간 동안 희망고문에 시달렸다. 홀로 남아 회의실을 정리하는데 얼마 전 친구가 단톡방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결승선이라고 생각하면 항상 반환점이더라고..."
팀장 주재로 진행되는 회의는 늘 그런 식이었다. 정글숲을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그러다 보면 팀장이 내려놓은 결론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니. 회의가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지가 정해진 출발이었으니까. 회의 중 나오는 팀원들의 의견은 과정이므로 그 자리에서 철저한 검증을 통해 '안 되는 이유'를 찾았고, 회의가 끝날 때 나오는 팀장의 의견은 결과이므로 '되는 이유'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의 의견과 팀장의 의견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과정과 결과라는 외피를 씌우면 그럴 듯해 보였다. 물론 그럴 듯해 보이도록 회의록을 작성하고 '되는 이유'를 찾아 실행한 뒤 다음 회의 때 보고하는 것은 팀원들의 일이었지만.
"매오 님, 근데...... 그래서 대체 뭘 하라는 거예요?"
비교적 최근 팀에 합류한 블루가 막 돌아온 매오를 보고 앉은 자세 그대로 의자를 끌어오더니 누군가 엿듣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물었다. 어차피 팀장은 담배 피우러 옥상에 갔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소곤소곤 하는지. "뭘 하긴 뭘 해요, 에효! 팀장이 하라고 한 거 해야죠. 뭐."라고 하려던 찰나, 누군가 매오 대신 답하며 끼어들었다.
"글쎄요. 이제부터 얘기해볼까요?"
팀의 기둥인 소이였다. 업계에서 가장 귀하다는 대리, 그것도 '일 잘하는 대리'로 통하는 소이는 매오와 블루에게는 유일한 동아줄이자 버팀목이자 방패였다. 매오는 그가 이직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누가 봐도 지나치게 많은 업무를 떠넘기는 팀장 덕분에 연차에 비해 꽤 많은 경험치를 쌓았는데도 소이는 그냥 할 일을 했다. 강제 렙업이지만 엄연히 렙업이었다. 그것들을 적절히 소화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이의 업무 역량은 평균 이상으로 봐도 무방했다. 소이라고 불만이 없진 않았다. 뒷담화의 포문을 여는 것은 웬만하면 매오였지만 한번 시작된 대화의 비중은 절대적으로 소이 쪽에 쏠려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매오나 블루는 팀 회의 때나 겪는 일을 소이는 매일, 매 시간 겪었으니까. 그는 항상 "저도 최소한의 선이란 게 있긴 있어요."라며 "그거 넘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라고 말하며 마무리하곤 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매오는 일잘러의 필수조건은 남들보다 한참 낮은 '최소한의 선'이 아닐까, 그를 보며 생각했다.
"소이 님이 보기엔 어때요? 팀장님, 이번에 말씀하신 건 제대로 기억하시겠죠?"
"좀 애매하긴 하네요. 사실 이게 엄청 중요한 내용은 또 아니라서 크게 신경 안 쓰실 것 같기도 하고."
팀장이 내린 결론들이 늘 터무니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팀장이었다. 보다 높은 위치와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짬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괜찮은 아이디어와 전략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열심히 따라가서 좋은 성과를 낸 적도 없지 않았다. 단지 태생적으로 수직적인 사람이 수평적인 문화를 추구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수평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게 답답했을 뿐. 매오는 팀장이 탑다운과 바텀업을 입맛대로 휘두르며 허영심을 채우는 데에 자기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게 불쾌했다. 하지만 더 크리티컬한 문제가 있었다. '아맞다 모먼트(A-Matda Moment)'였다.
"그게 뭔데요?"
블루가 팀원이 된 첫 날 업무분장이 끝난 뒤 매오는 그와 함께 얼마 전 오픈한 회사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팀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팀 분위기나 팀원별 성격, 자주 커뮤니케이션하는 타 부서 직원의 업무 방식 등 대체로 비공식적인 그러나 일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 아맞다 모먼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었다. 팀장은 종종 자신이 지시한 걸 까맣게 잊곤 했다. 악의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깜빡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팀장은 "아 맞다!"라며 탄식했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나마 '아 맞다'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심할 때는 말해도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잦았다. 억울하다는 표정은 어쩜 그렇게도 잘 짓는지.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마치 *그레이 스완, 팀 차원에서 관리해야 할 위험 요소이므로 매오와 소이는 그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어차피 고칠 생각도 없어보이는 팀장에게 철저히 비밀로 한 것은 물론이다.
확실한 건 불확실하다는 것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일단 지시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혹여나 발생할 수 있는 허탈함은 안고 가는 거고. 그러니까 아맞다 모먼트를 알려주는 의도는 업무적인 면에서 참고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면에서 쿠션을 깔아두라는 것에 가까웠다. 아매오와 소이와 블루는 회의 결론을 실행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다시 회의를 열었다. 팀장이 과연 이번 지시를 제대로 기억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불쑥불쑥 들었지만 셋은 그것을 애써 눌러가며 겨우 회의를 끝마쳤다.
"매오 님, 블루 님, 조심해서 들어가시고요. 뭐 또 어떻게든 되겠죠. 한두 번인가요."
인사를 나눈 뒤 지하철역을 향해 걷던 매오는 옆으로 지나쳐 가려는 택시를 충동적으로 잡아 탔다.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수도권 순환도로를 타고 쭉 달리면 넉넉하게 30분이면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물론 열 배 이상의 비용이 들겠지만 치맥 한 번 참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머리를 굴린 날은 최선을 다해 쉬어야 했기 때문에. 하지만 뒷좌석에 몸을 파묻고도 찝찝한 기분은 여전했다.
'팀장이 지시를 기억할지 안 할지 여부까지 고려하면 대체 대비해야 되는 경우의 수가 몇 개야?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귀찮아. 아이고 모르겠다!'
매오는 자세를 바꿔 미터기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택시는 어느새 번잡스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한산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지나치는 가로등 불빛에 매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주홍빛으로 조금씩 물들어가는 눈앞과 달리 머리속은 깜깜하기만 했다.
Credit
글 | 아매오
그림 | 미드저니로 제작
발행일 | 2021년 9월 8일
*이 에세이는 풀칠레터 56호 : 아, 맞다!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해 재업로드 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같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으신가요?
풀칠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매주 수요일 자정, 평일의 반환점에
새로운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Copyright ©풀칠 All Rights Reserved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